근초고왕, 내치로 전성기를 구가한 담큰 지도자

백제를 이야기할 때 근초고왕을 빼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백제 제 13대 왕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백제가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역을 차지하게 한 강력한 파워 리더십을 드러낸 인물이다.

백제사에서 근초고왕은 백제의 역사축을 변화사킨 강력한 분기점으로 막강 고구려를 잠재우고 신라, 가야를 한반도 구석으로 밀어붙였으며 중국과 일본을 흔들어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했다. 근초고왕은 위기를 맞을수록 더 공격적으로 나라를 경영해 정면으로 난국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우리 고대사에 길이 빛날 군주로 꼽히고 있다.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왕위를 둘러싼 내부 소요가 심각

재위 기간은 346년에서 375년이라고 추정될 정도로 짧다. 근초고왕이 즉위했을 4세기 전반 무렵은 내부적으로 아주 복잡한 상황과 여러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당시 백제를 주도하던 지도부는 건국의 주체세력인 소서노의 부여 고구려계 남하이민과 거주민이었던 마한지역의 정착민들, 그리고 낙랑 대방계의 한(漢)나라 유민들,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유입된 왜(倭)인 등이 마구 섞여 계보간 정치세력간 싸움이 치열했다. 특히 왕권을 둘러싸고는 고이계(古爾系)와 초고계(肖古系)의 싸움이 끊이질 않아 백제의 통합을 막고 있었다. 근초고왕의 큰 짐이었고 약점이었다.  

위협요인(threat)
: 낙랑군과 동서남북의 국가들의 견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한성시대에 백제가 말갈족과 고구려와의 싸움이 잦아 이를 소개하는 수십 편의 기사가 실릴 정도로 위기 상황을 겪었다. 특히 낙랑과 말갈의 침입으로 두 왕이 죽는 심각한 위협을 겪었다. 백제가 이들과 주로 싸운 지역은 오늘날의 연백 평산 포천 연천 등이다. 한사군과 말갈이 백제를 괴롭힌 근본 이유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 때문이었다. 백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 고구려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리더는 이 난관을 슬기롭게 이겨내야 할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 

강점 요인(Strength)
: 인내의 리더십과 잠재력

근초고왕은 내부적으로 고이왕 계열의 힘이 여전히 백제 정치계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그는 힘을 길러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전쟁으로 들끓던 백제가 20년간 조용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준비없는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는 근초고왕의 인내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부 단속과 체제 정비를 통해 백제의 기초실력을 키웠다. 힘이 없는 명분상의 외침이나 도전은 자칫 지도부의 와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상기하고 있었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한강을 둘러싼 패권싸움에 끼어들 여지가 충분

한반도 내에 아무도 절대 강자가 없었다는 점이 백제에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인 환경이었다. 신라와는 다소 우호적인 태도로 서로 견제를 하면서도 고구려와의 싸움에 힘을 쏟아 부을 수 있었다. 또 일본땅으로 정치 지도층을 보내 동맹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후방에 든든한 지원세력을 만들어 둔다는 것이 당시 근초고왕의 책략이었다. 이 노회한 정치력이 근초고왕의 백제호를 사국(四局) 쟁패의 제 궤도에 올려놓는 절묘의 승부수가 되었다. 가야는 약해지고 있었고 일본에 진출한 가야 세력 역시 지도력에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고구려는 계속 되는 전쟁으로 지쳐 가고 있었고 신라는 아직 전쟁을 시도할 힘이 부쳤다. 근초고왕에게 유리한 국면이었다.

때를 준비하고 기다릴 줄 알았던 지도자
근초고왕이 아버지 비류왕의 뒤를 이어 직위할 때는 여전히 백제는 미완성 상태의 고대국가 였다. 남부 지역 마한 제국의 여러 부족들도 아직 통합하지 못했고 강력한 고구려와 지리적 이점을 차지한 신라, 가야 6국 사이에서 약소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비류왕 시절에는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는가 하면 근초고왕 자신이 임명한 좌평 진정(眞淨)이 왕후의 친척임을 빙자해 권력을 마구 흔드는 등 국내의 정치적 안정도 채 이루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근초고왕은 왕권이 위협받는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체제 정비와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그는 먼저 왕위에 오른 이듬 해 347년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때부터 20년 이상을 내부 단속에 힘을 기울였다. 백제사에서 이 20여 년은 이례적으로 큰 사건이 없이 조용한데 이것은 근초고왕이 집안 단속으로 율령을 정비하고 중장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를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근초고왕은 침착하고 담대하게 군사를 조련하고 분열된 나라의 여론을 통일시키며 외부의 국제 정세를 관망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또 진 씨 가문(眞氏家門)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다. 왕권강화를 위해 진 씨 가문의 협조는 필수적인 정지작업이었다. 또 방에 대한 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분정(分定)하여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백제가 건국되고나서 한참 후까지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백제본기에 따르면 온조왕은 말갈과 낙랑의 침입에 시달리다 못해 수도를 천도할 정도였고 책계왕과 분서왕은 말갈과 낙랑에 의해 살해당하는 등 백제 초기에는 외침이 잦아 곤경을 치렀다. 

정치적으로는 고이왕의 손자인 분서왕이 피살된 뒤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다시 왕권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아직 확실한 왕권 강화도 어려운 시점이었고 국론도 통일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근초고왕은 대내외의 정치적 환경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우선 배후에 있는 신라가 말썽을 부리지 않는 것이 절대적인 과제였다. 

때가 무르익자 근초고왕은 가장 큰 적인 고구려와 싸우기 앞서 서기 366년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안심시켰다. 왕은 다시 2년 후인 368년 3월에도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좋은 말 두 필을 주었다. 신라와는 적이 아니라는 화해의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근초고왕은 372년 동진(東晋)에 조공(朝貢)을 바쳐 중국과 교린을 쌓아 고구려를 견제하였고 그 덕분에 영동장군영낙랑태수(領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되었다. 비록 동진이 약해진 틈바구니에서 얻어낸 정치적 승리였지만 고구려 입장에선 백제가 동진과 손을 잡은 것 자체가 큰 부담거리가 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우선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남쪽의 마한(馬韓)의 여러 부족국가들을 병합하고 가야제국을 남서로 더 밀어냈다. 이로써 영산강 일대와 부안 김제 정읍 고부 일원과 전라남도 일부를 공략, 백제의 강역을 크게 확대했다. 서기 369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역사에 나오는 대방(帶方)을 병합했다. 대방이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있지만 말이다. 

이해 9월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황해도 배천으로 추정)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이에 근초고왕은 근구수 태자(후일 근구수왕)와 군사를 보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공격하여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사로잡은 노획물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371년 근초고왕은 친히 태자를 이끌고 3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고구려 군사를 대동강(大同江)에서 무찌르고 평양성(平壤城)을 점령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켰다. 

염탐군을 적절히 활용한 이 작전에서 그는 고구려군의 군사기밀을 얻어 정예부대를 대파할 수 있었다. 승기를 잡은 왕은 이들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황해도 신계)까지 진군한 뒤,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서 회군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도와 강원, 황해도의 일부를 차지하는 강력한 고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성 시대의 본격 개막
하남위례성에서 건국한 백제는 근초고왕 26년에 이르러 도성을 크게 정비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보자. 

“백제의 근초고왕은 371년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는 기존의 왕성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서 남쪽의 한산 아래에 쌓은 새로운 성(城)으로 왕궁을 옮긴 사실을 의미한다.”

 

하남위례성, 백제의 성곽을 알려주는 남은 얼마되지 않은 유적들
하남위례성, 백제의 성곽을 알려주는 남은 얼마되지 않은 유적들

이른바 한성(漢城)체제, 즉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이라는 2개의 성곽으로 짜여진 새로운 도성제(都城制)가 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 시기 백제의 도성에 대해 학자들마다 다양한 이견이 나타나고 있지만 보통 한성으로 불리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이 성은 남성과 북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남성은 왕궁이고 북성은 거주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학자들 가운데는 북성이 지금의 풍납토성이고 남성이 몽촌토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 올림픽공원 한겅백제박물관에서 고대 백제국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 올림픽공원 한겅백제박물관에서 고대 백제국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근초고왕은 하남위례성에서 한성 시대를 연 지도자였다. 대규모의 도성을 정비하였다는 것은 곧 국력 및 왕권이 그만큼 신장하였음을 의미한다. 
대규모 도성 건축으로 표현되는 것은 곧 백제의 국력 신장이요 세의 과시였다. 특히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에 대해 함부로 덤비자 말라는 힘의 과시였고 신라에 대해서는 견제의 힘을 보여주는 적절한 과시용이었다.

먹거리를 해결하다

백제 연구자 이도학 씨는 신라 흘해 이사금 21년 즉 서기 330년 삼국사기 기사를 근초고왕 시절(369년 후)의 백제 업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것은 벽골제에 대한 기사로 다음과 같다.

“비로소 벽골지를 개착하니 둑의 길이가 1천8백보였다.”(<삼국사기> 홀해 이사금 21년조)  

1천8백보라면 일 보를 70cm로 잡아도 1.2km 이상의 큰 저수지 둑이 된다. 백제가 김제 지역으로 진출한 것이 369년이 확실하므로 벽골지 개보수와 증축은 근초고왕 때 일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후대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승자승(勝者勝)의 역사 기록으로 30년 이상을 앞당겨 신라의 업적으로 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정도의 공사는 어떤 규모일까? 이도학 씨는 이 저수지 둑 공사에 연인원 322,500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측했다. 이미 근초고왕은 당시 이 많은 인력을 동원하고 관리할 수 있는 동원체제를 백제 안에서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김제 지역과 그 주변부는 지금도 한반도의 식량 창고다. 피땀을 흘려 얻어낸 땅이 평지에다 비옥한 농사지역이라는 점은 근초고왕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근초고왕이 20년간이나 준비하며 갈고 닦아온 내치의 정성의 비밀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열도에 투자를 꾀하다

근초고왕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도자였고 한류 문화 전파의 선구자였다. 
근초고왕이 해상무역에 힘을 기울여 요서(遼西)지방에 무역기지로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고, 또 큐슈 지역으로 진출하여 백제를 해상강국으로 키웠으며 해상교통로를 확보, 중국의 요서지방과 왜, 한반도 남서부를 이음으로써 이후에 이루어지는 왜의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해상 통상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인정받는 이야기지만 보수적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확대 해석을 금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일본열도로 활발히 진출하여 백제계통의 일본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다. 

사실상 서남해안 무역로는 과거에 수로대왕 이후 가야국이 독점하고 있던 해상 무역로였다. 이 길을 접수함으로써 백제는 명실상부한 서남해안의 패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지역에 설치한 무역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지역에 자리한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여 고대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일본 상류지도층과 백제계의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로 이어지게 되어 고대 한류문화의 본격 일본 진출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일본 지도층의 도래인(한반도에서 넘어온 인물들)이 일본 열도를 지배하다 못해 맹렬한 패권다툼에 이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같은 백제와 일본열도의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온 ‘칠지도(七支刀)’가 있다.

 

칠지도 : 칠지도는 철제 칼이다.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에 있고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칠지도 : 칠지도는 철제 칼이다.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에 있고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특히 일본이 국보로 정해 소중하게 받들고 있는 칠지도가 고대 한류의 상징이다. 칠지도는 길이 74.9cm의 칼로 칼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칼이 각각 3개씩 나와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어 칠지도라 부른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記)에 "백제가 일본에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학자들은 이 칼을 4세가 초반 근초고왕이 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에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한다. 

 

왕인박사 동상과 유적지(전남 영암)
왕인박사 동상과 유적지(전남 영암)

근초고왕은 또 일본 열도에 왕인 등 백제의 오경박사와 지식인을 수출하여 일본 식자층에 처음으로 <천자문> <논어>를 전하고 이를 학습하게 하였다. 후일 아직기는 일본왕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고 아직사라는 핏줄의 일본 귀화인의 첫 조상이 되었다. 근초고왕이 보낸 왕인은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갖고 가 일본에 전하고 가르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이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근초고왕이라는 한 시대의 걸출한 지도자의 역량은 미약하던 한반도 안에서 백제의 이미지를 강력한 부흥국으로 다시 살리고 대내외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리더 한 사람이 일으킨 놀라운 변화가 백제를 고구려와 맞먹을 수 있는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 낸 것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바끄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