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해묵은 난제를 털어내 버린 힘의 군주 ‘고려 광종’

우리는 시기적으로 현대와 가까운 조선에 대해서는 다양한 사료를 접할 수 있는 편이다. 그에 비해 고려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기도 하고 사료를 접할 기회도 흔치 않다. 그중에서도 구려 군주들에 대해서는 생소하기까지 한 형편이다. 그렇지만 조선과 비교할 만한 군주로 시각을 바꾸어 보면 역사적으로 대단히 비슷한 군주들이 보인다. 

지난 연재에서 다룬 것처럼 조선에 태종 이방원이 있었다면 고려에는 광종 왕소(925~975, 고려 4대 군주)가 있었다. 광종은 한 마디로 해결사 군주였다. 고려는 개국은 했는데 한마디로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난맥상이었다. 이 어지러운 정국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힘으로 과감한 개혁을 밀어붙였던 인물이다. 어찌 보면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 왕소의 인물과 리더십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편집자 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기획했던 송도전경.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기획했던 송도전경.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왕권과 지지기반이 약한 마이너리티 군주였다

네 번 째 동생 광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정종은 태조 왕건의 3남이었다. 그는 2대 임금 혜종이 요절하자 왕위에 올랐는데 아직 왕권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서경 천도를 서두르다가 실패한다. 이것은 민심이반으로 이어졌고 개경파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개경(송악, 개성) 사람들은 대단히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이들이었다.

21세기에도 서울에서 행정기능을 빼내 세종으로 보내면서 지금까지도 얼마나 많은 시시비비가 나오고 있는가? 당시로서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개경파를 많이 죽인 데 대한 죄책감과 약간의 우울증 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정종은 결국 3년 6개월간 왕위에 올랐다가 병에 걸려 동생 왕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왕권을 받은 왕소 즉 광종은 집권 초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왕자들과 호족들의 견제 속에 그는 큰 부담을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다수당에 눌린 마이너리티 군주였던 셈이다.

위협요인(threat)
: 후주에 거란까지 위협이 턱밑까지 밀려왔다

광종이 즉위한 무렵에 중국 땅에는 후주가 새로 기운을 떨치며 부상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 한반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후한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후주가 중원의 맹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위협은 거란과 여진이었다. 국경 부근에 붙어 있으면서 고려 신민들을 괴롭혀 온 거란과 여진은 강성해질수록 고려에게 큰 위협과 부담이었다. 광종은 이 어려운 시기에 국가경영을 맡아 부국강병의 목표를 세우고 호족을 철저하게 견제할 방도를 속내에서 몰래 꿈꾸고 있었다. 조선으로 따지자면 명나라 옆에서 청나라가 새로 힘을 쓰면서 한반도에 칼을 갈고 있는 형국이고 현대로 따지자면 중국과 러시아가 음으로 양으로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강점 요인(Strength)
: 협상력이 탁월한 전력가적 기질이었다

광종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면적인 성격을 가졌다. 겉으로는 왕건의 부드러운 이미지에다 내면으로는 냉정하고 침착한 전략가적 기질이 있었다. 게다가 정관정요 같은 책을 열심히 읽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독서력의 장점도 갖추고 있었다. 또 다른 면으로는 사교성이 좋고 협상력이 강해 사람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와 흡인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에게 끌렸고 그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광종의 또 다른 면은 냉혹하고 차디찬 면도 갖추고 있었다. 그가 개혁을 시작했을 때 그는 강력한 군주의 카리스마로 호족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일말의 사적인 정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의 성격적인 강점이 그를 고려 최고의 개혁가로 만들어 낸 것이다. 광종의 개혁적 리더십은 숙청 대상으로 정치적 경쟁자들을 잡은 데 반해 그 수혜 대상으로는 일반 백성들을 잡고 있었기에 명분과 실리에서 그는 승기를 잡고 있었다. 조선조의 태종과 비견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잔혹성에 기반한다. 그런 과감한 결단 때문에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한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지식인층 유입으로 선진문물을 보고 배우게 하다

글로벌 트렌드를 바라볼 줄 아는 이가 광종이었다. 무엇이 나라를 강하게 하고 무엇이 나라를 발전시킬 것인지를 그는 알았다. 그는 인사가 만사라고 여긴 인물이었다.
중국의 앞서 가던 문물이 고려로 자연스레 흘러들어오던 시절이었다. 특히 5대 10국의 쟁패가 일어나 혼란과 발전이 뒤섞여 있던 시절이었다. 5대10국(五代十國, 907년~979년)의 마지막 나라인 후주의 문물과 사람 등 엄청난 선진 문물이 전쟁의 바람을 타고 고려로 흘러왔다.

후한을 멸하고 후주가 들어서면서 중국 땅에도 개혁의 바람이 불어 왔다. 그러나 후주도 9년만에 무너지고 말았으니 이 당시를 전후해서 많은 귀화인들이 고려로 들어오게 되었다. 광종은 이들을 주목하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게 된다. 기존의 타성에 젖은 관료들을 개혁하는 방법으로 광종은 새 피를 수혈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들로부터 선진문물을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경쟁이 도입되고 안일하던 관료들이 생존을 위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리더십
-인내와 기다림이 무기가 되다

힘을 쓸 줄 아는 광종이었지만 일부러 나서지 않고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 광종 왕소는 사실 왕자 시절 이미 힘을 지닌 정치적인 실세였다.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 왕조 창건에 직접 관여했으며, 왕건 소생의 많은 왕자들 가운데서 친형인 정종과 함께 가장 핵심 권력을 가진 그였다. 왕식렴, 박수경 등 당시 실력자들과도 친했기에 정치적인 모임을 가지며 탄탄한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정종 사후 왕위에 오른 그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어떤 시도도 기울이지 않았다. 집권 초 섣불리 서두르거나 개혁을 재촉하지 않았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 한 대목이다. 최근 50년 대한민국 대통령 역사에서 이런 기다림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물론 평생 군주니까 경우는 다르겠다. 그럼에도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큰 장점이었다.

그에게는 적어도 적이 누군지, 자신을 방해할 세력이 누군지를 파악하고 그들의 약점을 찾을 수 있는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엎드려 자신을 낮추었다. 당시는 고려 창건 직후라 호족들의 세력이 너무 커서 그들을 거슬려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심지어 태조 왕건조차 정치적 결정 때마다 호족들의 눈치와 견제를 살펴야 할 정도였다. 광종은 이런 시국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서둘지 않고 기회를 기다리며 자신의 미약한 힘과 군주의 명분을 축적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극대화할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기간이 7년간이나 되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참을성 있고 끈기있는 인물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친형인 정종은 과격하고 급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광종은 침착하고 성실한 데다 오히려 냉정했다. 최승로는 그의 기질을 묘사하면서 ‘치밀하고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특이한 풍채를 지니고 우수한 자질을 가져 태조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광종의 초기 7년은 기다림이었다. 경쟁자들의 장단점을 살펴보는 기간이었다. 

정치 매뉴얼을 제대로 익히다
-독서력으로 자신을 수양한 영민한 군주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근신들과 정치적인 문제를 논한 것을 현종 때 역사학자 오긍(吳兢)이 항목을 분류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정치와 치도(治道)의 요체를 말한 것으로 동양의 많은 군주와 사대부들에게 읽혔으며 역대 군주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일 것이다. 당태종은 중국의 제왕들 중에서 성군으로 꼽히는 인물로 그를 본받고자 하는 임금들에게 제왕학의 교과서 역할을 함으로써 서양의 <군주론>과 대비되는 책이다. 고려 시대 제왕들은 이 책을 중시하였고, 조선 초기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고려 광종이 특별히 이 책을 선호하여 자주 많이 읽고 제왕의 리더십을 익혔다고 전한다.

이 책에는 군주가 지켜야 할 도리에서부터 정치의 본질과 어진 사람을 발탁하는 법, 올바른 간언의 권장과 수락, 관리의 선발, 제후를 세우고 태자와 왕자들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등에 대한 원칙과 교훈이 들어 있어 다스리는 자에게는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광종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리드해 나갈 고려국의 통치 교본으로 삼았다.

<정관정요>를 통해 군주가 할 일과 신하의 할 일을 구분하고 왕권과 신권의 경계를 엄격하게 정리하는 일, 그것이 광종이 7년간 고민하며 심사숙고해 온 요체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권력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력한 반발이 일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칫 피를 부르는 정파간 호족간 정쟁이 발생할 것이었다. 명분도 필요했다. 백성들이 이를 보고 믿고 따라주길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숨을 죽이고 참아온 터였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자는 자신보다 형편없는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쏟아붓는 법이다. 상대가 한숨을 놓고 경계를 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번에 덮치는 사자처럼 광종도 경쟁자인 호족들이 광종에 대해 의구심을 풀고 무장해제할 때까지 7년간이나 묵묵히 기다린 다음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필살기를 찾아내 전심전력으로 그들을 밀어붙이게 된다. 

 

개성의 성균관.  광종이 귀화시킨 후주 사람 쌍기가 귀화후 도입한 과거시험으로 본격적인 인재 경쟁체제가 시작되었다.
개성의 성균관.  광종이 귀화시킨 후주 사람 쌍기가 귀화후 도입한 과거시험으로 본격적인 인재 경쟁체제가 시작되었다.

인사를 뒤흔들어 개혁을 완수해내다
-새로운 피를 대거 수혈

광종은 인사가 만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는 주변의 인물을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그리고는 갈라낼 이와 같이 가야 할 이를 챙겼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다. 고려의 문제는 호족간의 정치적 이해타산과 인사의 균형 배분에 있었다. 즉, 어느 한 쪽에 권력이 쏠리지 않게 서로 극심하게 견제하기 위해 능력보다 권력의 배경과 출신에 신경을 써서 인재를 뽑아 왔기에 개혁은 물 건너가고 수구와 보수, 안정과 눈치보기라는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국제 정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951년부터 후주가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고려 광종은 후주를 정치적 동반자로 삼아 돈독한 실리 외교를 펼치는 한편, 거란과 여진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국경이 튼튼하지 않고 전란이 잦으면 내치를 이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종은 이 때 후주의 2대 군주 세종에게 실력있는 인재, 쌍기의 영입을 의뢰한다. 그는 후주 건국에 깊이 관여하였고 왕권 강화에 나서 정국을 안정시킨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우리 역사를 보면 많은 숫자의 외국인이 우리나라로 귀화해 왔다. 특히 고려시대 한반도를 찾은 대표적인 귀화인이 쌍기다. 쌍기는 중국 후주에서 고려에 귀화한 쌍철(雙哲)의 아들로, 956년 중국 후주의 사신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와서 신병 때문에 체류한 인물이다. 고려사 93권을 보면 광종이 쌍기를 불러 대화를 하는데 그 응대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왕과 외국인 신하간의 접견, 이를 테면 구술 면담이었을 텐데 광종은 쌍기를 한 번 만나본 후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에 한 나라의 책사를 다른 나라 임금이 신하로 쓰게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광종은 후주의 세종을 설득하여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귀화라는 것이 쌍기가 남지 않으려 하면 불가능한 일 아니던가. 쌍기는 왜 광종에게 설득당했을까? 광종의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돋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광종은 쌍기를 만나 자신의 포부와 비전을 설명하고 고려에 남아주기를 간청했다. 쌍기는 후주의 사신들이 귀국할 때 병을 핑계로 돌아가지 않고 남았다가 고려에 귀화했다. 

왕은 그의 능력이 출중함을 깨닫자 즉시 후주 임금에게 국서를 보내 그를 고려인으로 귀화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후주에서 이를 허락함에 따라 쌍기는 귀화인이 되어 원보 한림학사가 되었다. 게다가 후주가 10년도 못 버티고 무너지면서 쌍기는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고려인으로 귀화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광종과 쌍기는 튼튼한 정치적 파트너가 되어 부창부수로 고려 개혁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쌍기는 이제 고려 개혁의 칼을 거머쥐게 된 핵심 인물이 된 것이었다.

그는 958년 당나라 관리 임용제도를 도입, 과거제도를 창설하게 하고 몇 차례에 걸쳐 지공거(과거를 주재하는 시험관)를 역임했다. 이것은 호족들이 돌려막기 인사를 하고 있을 때 새로운 젊은 피, 그것도 권력의 중심부와 관계없는 젊은이들을 실력위주로 뽑아 공급함으로써 고려 조선의 사대부층이 집단적으로 양성되는 효과를 낳게 한다.

드디어 958년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종은 과거제를 전격 도입하게 된다. 대부분의 호족들은 왕건과 함께 싸우고 달리던 무장들이었다. 과거제로 인해 학문으로 무장한 신진 세력이 대거 정부에 들어서자 학문과 이론에 빈약한 무장들은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레 호족의 자제들이 밀려나고 호족과 관계없는 젊은 피가 조정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쌍기가 한반도에 중국의 선진 문물을 소개하고 앞선 과거제도를 도입하게 한 것은 한반도의 정치 문화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쌍기는 왕권을 정착시키고 고려 조정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이다.

과감하게 개혁을 밀어붙인 회심의 한 수

광종 당시 고려의 문제는 결국 호족들의 세력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7년간 암중모색하며 강력한 적이자 경쟁집단인 호족들을 물리칠 방법을 찾아온 광종 아니던가. 그는 쌍기를 통해 과거제도로 호족을 견제하는 동시에 새로운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물론 이 비책에도 쌍기가 관여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첫 번째 비책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었다. 노비 문제는 정치권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늘 문제가 되었는데 이는 노비의 숫자가 곧 자산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가 많은 집은 그만큼 경제력이 뛰어났고 경제력이 뛰어나면 사병을 많이 거둘 수 있었다. 노비와 사병은 곧 권력이고 생존의 수단이었다. 

쌍기는 노비를 축소하는 것과 과거제도 도입으로 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세력을 키우는 안을 광종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후주의 정체개혁을 주도했던 쌍기는 고려에서도 개혁을 주도하는 참모가 되었다.

당시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가 있었는데 호족들이 사노비로 많은 수의 백성을 거느리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 사노비는 언제든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가용 병력이라는 점에서 왕권에는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호족이나 장군들은 포로와 농지를 떠난 유민들, 도적떼들을 잡아다 강제로 자신의 소유로 삼고 일을 시켰다. 

광종은 쌍기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우선 노비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 956년에 실시된 노비안검법은 삼국시대 때부터 노비였던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평민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이었고 그것도 이런 저런 복잡한 절차없이 신고만 하면 쉽게 노비를 면천해 줌으로써 이들을 국가 소유의 가용 병력으로 활용하게 되어 경제력과 국방력을 크게 키울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호족과 왕실 내부에서까지 심각한 반대가 나왔으나 광종은 7년 동안 그에게 기울어진 민심을 기반으로 개혁을 마무리지었다. 이로써 호족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조선조 태종이 호패제를 실시하고 사노비를 철폐시킨 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평생이론인가 싶을 정도다. 

필요하다면 힘으로 밀어붙여라 ‘철권정치의 등장’

광종은 개혁을 마무리짓기 위해 호족과 신신세력의 정치적 견제를 시도하며 왕권을 효과적으로 강화했다. 특히 정적이 될만한 이들은 철저하게 눌러버리고 숙청함으로써 공포정치를 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아끼던 신하들에게는 충성한 만큼 보상하고 위로하며 논공행상을 분명히 했다. 

호족들이 광종의 냉정하고 전략적인 기질을 알아차린 순간, 그는 이미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른바 피의 숙청이었다. 광종은 자신의 왕권강화책에 반대하고 군주를 폄하하거나 장애세력이 될 만한 호족에 대해 냉정하게 목숨을 빼앗아버렸다. 대담하고 집요한 숙청 사업이 동시에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960년에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하면서부터였다. 광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왕권에 도전하는 역모 세력을 처결한다는 명분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광종은 이들을 귀양보내면서 아버지 왕건과 함께 고려 통일에 적극 협조했던 정권 창출 세력까지 단호하게 처벌했다. <고려사>는 이 시기에 광종이 역모를 고변하는 자들에게 귀를 열어 놓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즉,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성하고 착한 사람들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권력의 정상인 왕만 존재하는 확실한 피라미드형 중앙집중적 권력이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감옥이 넘쳐 나 일부러 임시 감옥을 만들 정도였고 죄가 없어도 끌려와 목숨을 잃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광종은 왕권을 넘볼 소지가 있는 호족세력에 대해 특히 가혹하게 눌러버렸다. 골육과 친인척의 권력가들은 더 의심하고 적대행위를 할 가능성 있는 인물은 뿌리부터 제거해 버렸다.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 비명에 죽게 한 것이 그 증거였다. 삼촌의 조카 살인, 광종은 그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최승로는 그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양조( 두 임금)가 모두 오직 한 아들이 있었는데 또한 그 성명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광종은 제도적으로 권력이 공고해질 때까지 조카들까지 숙청하면서까지 욕먹는 것을 조금도 피하려 들지 않았다. 이 역시 처남 넷을 죽이면서까지 철저히 신권을 눌러버린 조선 태종과 너무도 흡사하다. 

스스로 황제라 칭하다

임제라는 조선의 한량 선비가 죽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긴 이야기를 대략 정리해 보면 이렇다.
“몽고와 여진을 들며 이들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한족을 밀어내며 독립국의 우월한 존재를 뽐냈다. 우리는 한 번도 황제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 나라에서 내가 죽는다고 과연 슬퍼할 일이냐? 울지 마라?”
참 대단한 포부 아닌가. 고종이 황제를 칭했던 대한제국 말기는 이미 기운 해였다. 

서기 960년 광종은 관료들의 공복을 제정했다. 즉 등급별로 옷을 입히고 서열화한 것이다. 사색공복(四色公服)에 따라 4계층으로 관료들을 구분하고 토지를 나눠주면서 서열에 따라 차등 지급하여 등급을 넘어서는 반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광덕(光德)' '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해 고려가 중국에 속해 있지 않은 자주국임을 선언했으며,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불렀고 만년에는 ‘황제(皇帝)’라는 호칭까지 스스로 사용했다. 광종의 지속적인 왕권 강화책으로 인해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이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라서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려가 광종 이후 국가체제의 안정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다 그의 덕분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후일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자 자신이 죽이고 쫓아냈던 정적과 그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우고 민심을 어루만지는 유화정책도 펼쳤다. 

그는 조선의 태종 이방원 이상으로 많은 정적들을 죽였지만 태종 이후 세종의 태평성대를 이루어낸 것처럼 광종 이후 성종의 태평치세를 만들어 냄으로써 고려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강화했던 인물로 기억되었다. 

민심을 통일하라

분열된 나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광종의 신념이었다. 963년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간 것은 민심을 서둘러 통일시키고 호족들의 반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두 가지 효과를 거두었다. 

귀법사의 승려 균여(均如) 탄문(坦文) 등을 통하여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또 광종은 재위 19년에 혜거를 국사(國師)로 삼아 불교의 진흥과 이념 통일의 지도자로 세웠다. 고승 가운데 국사를 삼는 전통은 광종 때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각종 불교행사를 많이 베풀고 절도 많이 지었다.

광종은 외교정책 면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함으로 왕조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고 고려국의 위상을 크게 알리게 되어 그 이름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가 죽은 후 시호를 대성(大成)이라 했으니 그가 얼마나 크고 많은 일을 이루어낸 것인지 짐작할 수가 있다. 

조카마저 죽여버린 피의 군주, 나라는 안정시켰다

고려 광종은 혜종과 정종 두 형의 외아들 목숨을 빼앗았다. 그는 경쟁자가 될 모든 정적을 숙청했다. 모진 숙청이었지만 왕권은 강화되었다.  광종이 이렇게 모질게 조카까지 죽인 것도 놀랍지만 그의 아들(후일 경종)조차도 아버지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니 얼마나 모질게 정적을 제거하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공신 박수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964년(광종 15)에 세  아들 승위(承位) 승경(承景) 승례(承禮) 등이 참소로 모두 감옥에 갇히자 화병으로 죽었다. 그래도 광종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피의 숙청을 오늘의 시점으로 재해석하라

경쟁자의 제거와 협력자의 발굴 이 두가지가 광종의 리더십 요체다. 군주가 없고 선출직 대통령과 지자체 장들을 뽑는 시절이나 광종 시대와 직접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기업의 경우라면 아주 비슷한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광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살아남기 위한 승부수였다. 그는 정상적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사실 적자 승계가 아니었다. 혜종과 정종의 아들이 멀쩡히 살아 있었기에 그들이 성장하여 정치적 위상을 가지게 될 때 어떤 호족이든 같이 손잡기만 하면 언제든 왕위를 노릴 수 있는 개연성이 풍부했다. 그러므로 경쟁자로 크기 전에 사전에 손을 보았던 것이다.

기업의 CEO라면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어떤 경쟁자도 허용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의 어떤 CEO라도 강한 지원세력과 제휴를 맺을 것(광종이 태조의 딸과 혜종의 장녀를 부인으로 맞은 것처럼)이다. 그는 사내에서 자신에게 대적할 만한 경쟁자의 싹이 보인다면 일찌감치 손을 봐서 다른 회사로 보낸다든지 한직으로 보낼 것이다.(광종이 두 조카를 밀어내고 호족들을 숙청한 것처럼)

그가 조카들까지 죽음으로 내 몬 것을 칭찬할 수는 없는 일이나, 7년간 묵묵히 힘을 기르며 다른 경쟁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경계를 풀게 한 고도의 정치력은 충분히 배울 만하다. 그 인내력과 고도의 심리전, 기회가 왔을 때 원샷원킬의 포착력으로 상대를 제압해 낸 것은 경탄할 만하다. 역사 속에서 광종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 내 과격한 개혁과 피의 숙청 덕분에 다음 임금들은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신하들을 통솔할 수 있었지 않은가?”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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