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태조 왕건, 포용의 리더십을 보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계층간 빈부간 격차는 더욱 커졌고 이념과 진영으로 나뉘어져 분열이 극심하다. 오죽하면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국민 통합을 위한 정책과 사업을 담당할 대통령 직속 위원회가 출범할 정도일까?

상황과 시대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고려 왕국이 들어서던 시기의 분열상도 극심했다. 신라 고려 후백제로 나뉘어져 목숨을 걸고 싸웠던 후삼국시대의 피도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왕건으로서는 이 찢겨진 나라와 민족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가 큰 고민거리였다. 

그 해답은 왕건의 가리지 않고 실력 위주로 채용하는 인재경영과 포용정책으로 귀결된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부하를 휘어잡는 포용방식과 인재를 얻기 위해 겸손하게 고개 숙이는 모습이 사람의 마음을 모았던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리더십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국경 : 고려는 북계와 동계를 중심으로 양계를 정하고 개경(송악) 남경(한양) 동경(경주) 서경(평양) 등을 세워 지방 분산 정책을 취해 강력한 중앙집권 방식의 조선과 대비된다.
국경 : 고려는 북계와 동계를 중심으로 양계를 정하고 개경(송악) 남경(한양) 동경(경주) 서경(평양) 등을 세워 지방 분산 정책을 취해 강력한 중앙집권 방식의 조선과 대비된다.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불안한 동거, 지지층보다 적들이 많았다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장수들로부터 서기 918년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즉위 초부터 저항세력이 많아 정정이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그는 정치적인 인물도 아니었고 오로지 공직에서 장수로만 머물렀던 경험 부족도 약점이 되고 있었다. 그는 송악(개성) 지방에선 덕망높은 장수였으나 전국적인 인지도는 여전히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왕이 바뀌었어? 누가 왕이 됐다고? 그러다 또 바뀌겠지 뭐...”
당시 이런 민심의 동요와 송악 출신의 지지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이 왕건의 가장 큰 취약점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 특히 새 왕조의 태조가 된다는 것은 무력으로서의 승리 뿐 아니라 이론과 명분에서도 그가 왕이 될 만한가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왕건은 즉위 초 그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위협 요인(threat)
: 후백제와 신라의 유민들, 성난 민심이 그를 비딱하게 노려보고...

중앙정치의 약점 말고도 왕건이 염려할 위협요인들은 너무나 많았다. 가장 큰 지방의 정적은 백제의 부흥을 꿈꾸는 후백제 지지세력이었다. 백제 부흥을 소원하는 제법 많은 수의 군부 출신 관료와 반 왕건파 반 고려파 출신들이 호시탐탐 고려의 앞날을 막고 나섰다. 또한 궁예에게서 많은 혜택을 누렸던 청주지역의 친궁예파 호족들이 왕건의 잠재적 경쟁자로 나서고 있었다. 한편 신라의 북쪽 요새 지역이었던 명주땅 신라 유민들도 왕건의 집권에 드러내 놓고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이밖에도 고려의 경제적 기반이 취약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었기에 민심의 이반이야말로 새 왕조의 태조를 가장 위협하는 위협요인이 되고 있었다.

강점 요인(Strength)
: 적대세력과 성난 백성을 대화로 위로할 줄 아는 소통력...

그러나 왕건에게는 견훤이나 신라 경순왕이 죽어도 흉내내지 못하는 결정적 강점이 두 가지 있었다. 왕건은 민생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위민의식과 사랑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고려를 세우자마자 실시한 첫 번째 시책이 백성들의 곤궁을 해결하기 위한 안민책(安民策)이었음이 이를 입증해 준다. 또한 왕건은 아무리 자신에게 치명적 손해를 입힌 적이라도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리더십이 있다는 점이었다. 신라의 경순왕을 보듬어 안고 원수지간이었던 견훤을 받아들인 것이 왕건이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강점이었다. 이 두 가지가 가장 결집력 약하고 국방력도 상대적으로 약하던 고려가 승전국이 되게 한 강점 요인이었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중국 내부사정(송과 거란의 다툼)으로 한반도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주변 4국의 불안한 정세가 큰 위협이 되지만 고려 때는 이와는 달랐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화북지방 주요 도시와 16주(州)를 얻어 947년 국호를 요(遼)로 개칭한 다음 계속 남진정책을 실시했다. 한편 960년 송이 건국됨으로써 중국은 절대 패자가 없이 거란과 송의 대치가 계속되는 상태였다. 어느 한 쪽이 반대쪽을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하는 상황은 어정쩡한 대치 상황을 만들게 되고 힘겨루기 양상만 되풀이하게 되는 법이다. 한반도는 상대적으로 두 나라의 관심에서 잠시 멀어져 있었다. 왕건은 양측을 적당히 견제하면서 안정된 상태로 새 왕조의 안녕을 이룰 수 있었다.

왕건, 무리수를 두지 않는 포용의 리더십

궁예는 명분이나 실력에서 다른 후삼국의 지도자들을 훨씬 앞서고 있었다. 신라 왕족의 후손에다 미륵불을 자처, 새로운 세계를 비전으로 제시한 그였기에 송악 출신 호족이던 왕건조차 896년 자신과 송악의 가문 모두의 운명을 궁예에게 맡겼다. 하지만 궁예는 힘을 얻자 욕심이 커지면서 백성을 수탈하고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궁예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지나치게 걷어 들이면서도 부하를 믿지 못하여 함부로 죽이고 자신을 충심으로 따르는 왕건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등 군주로서의 리더십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로써 시작된 민심이반을 궁예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 정권을 잃어버렸다.

왕건은 이 점에서 궁예와 차별된다. 그는 민심의 안정이 군주의 가장 큰 사명이자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왕건은 전쟁 수행 능력이 뛰어나고 탁월한 통솔력에 백성들의 신망도 차지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궁예를 넘어서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무리하지 않고도 지도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한편 훨씬 더 강력한 한반도 통일의 후계자였던 후백제 견훤은 농민출신이었다. 그는 서남해 방면의 방위군 무장으로 있다가 892년 농민반란군을 규합하여 무진주(광주)를 공략하고 완산주(전주)까지 장악했다. 그는 이곳을 근거로 백제의 유업을 이어받고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후백제를 세웠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면서 경애왕의 비빈들을 욕보이는 등 무력을 앞세운 강점과 침탈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전쟁에선 이겼지만 적국의 백성들로부터 원수가 되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국방력이 약했던 왕건이 견훤을 이긴 가장 큰 힘은 바로 이같은 위민의 군주냐 폭압의 군주냐의 차이점에서 비롯된 민심의 선택이었다. 918년 6월 실정을 거듭하던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된 왕건은 국력이 미약해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지만 서두르지 않고 민심 수습부터 시작했다.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시대의 가혹한 조세를 낮춰주는 조치를 취했다. 

민심을 꿰뚫은 경제통 군주

왕건은 민심의 안정은 풍요롭게 먹고 사는 데서부터 나온다고 믿은 경제제일주의자였다. 왕건은 고려 건국 바로 다음 날에 조서를 내렸다.

“궁예의 경제적 실정으로 인한 백성의 원성을 경계하고 이달부터 나라를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경비를 마땅히 근검 절약하라.”

이를 위해 태조는 궁중의 운영 비용을 크게 줄였고 둘째 기존에 거둬들인 조세인 양곡과 베를 검사해 이를 먼저 활용토록 했다. 셋째, 조세와 부역을 면제 혹은 감축해 주었다. 그것은 충분한 양곡이 있음에도 수탈을 일삼던 궁예와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구체적으로 왕건은 비축미를 살펴 검사하게 하고 이를 궁중에서 깨끗하게 소비해 쓸데없는 조세를 거두지 못하도록 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정부나 지자체 정부, 혹은 기업에서 연말에 예산을 있는 대로 써버리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관리한 것이다. 

특히 궁중에서 먼저 모범을 보였다. 궁실이 비바람을 가릴 만하면 더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왕건의 생각이었다. 이로써 왕실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된 부속 노비들을 제외한 일반 공역을 위한 노비는 모두 교외로 내 보내고 세금만 내면 자유롭게 살도록 조치했다. 고려의 충신 최승로가 왕건의 알뜰한 왕실 살림 규모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태조 왕건이 10년 동안 쓴 왕실 비용이 후대의 광종이 1년간 지출한 비용과 같을 정도였다는 것이고 보면 왕건의 긴축재정과 근검 절약은 가히 수준급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세 번째 조세를 크게 줄였는데 형편에 따라 지역에 따라 차등을 주고 원래 부담하던 조세의 절반이나 3분의 1까지 대폭 세금을 완화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게다가 고향을 떠난 유민들이 돌아와 농사를 다시 짓겠다고 신청하면 3년간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는 획기적인 조치도 취해주었다. 궁예 치하의 백성들은 밭 한 마지기에 세금을 6석 거두는 등 수탈을 계속해 농사를 포기하고 도적이 된 유민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으나 왕건의 조치로 많은 유민들이 돌아와 농사를 다시 짓게 되어 국가적으로도 경제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백성들이 그를 따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갈갈이 찢긴 내부의 반대세력을 하나로 통합해내다

왕건은 내외부의 적과 두루 소통하고 껴안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렇듯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포용력이 왕건에게 있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다.  

왕건은 935년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 경순왕의 항복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마침내 936년 왕건은 왕실내분으로 혼란한 후백제와 일선군(善山)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게다가 왕건은 거란으로부터 멸망당한 발해 유민들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백성으로 삼았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여의치 않았지만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유업을 이어받는 나라였기에 고구려의 유민이 대거 흡수되었던 발해를 한 핏줄의 나라로 본 것이었다. 그 속에는 여진과 거란인 일부도 포함되었으나 그는 구애치 않고 고려 신민으로 모두 받아들였다. 왕건의 포용력이 돋보인 과감한 결정이었다. 

왕건은 무술이나 언변, 부하를 사로잡는 카리스마로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부족한 것이 많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겸손하게 머리를 숙일 줄 알고 적들조차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정도의 ‘포용의 리더십’을 가졌으며 분란보다 화합을 중요시하는 정책을 펼칠 수 있었기에 대업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위기와 혼란이 다가올 때, 내부의 적을 잠재우고 외부의 적을 껴안고 간 왕건의 ‘포용의 리더십’이야말로 이 시대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역사의 교훈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가장 어려울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기다릴 줄 아는 지혜,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삼국의 통일을 이루어 낸 것이었다. 

그러나 왕건의 문제는 그 때부터였다. 서로 원수가 되고 죽음을 불사하며 싸웠던 삼국의 유민들, 그리고 도처에서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지방호족들, 함께 싸웠지만 논공행상에만 관심을 가지는 부하 장수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비책이 나와야 했다. 국론 통일부터가 급한 과제였다. 

이 시기 왕건 특유의 장점이 발휘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지방호족들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결혼정책으로 이들을 끌어들였다. 왕건의 부인이 29명이나 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역사가들은 고려정권의 안정과 지방 호족과의 화합정책을 위해 왕건이 벌인 혼인정책이 통일 이후 정국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했지만 한반도 전역의 지배적 통일은 아니었다. 대립하는 적국의 정권들을 소멸한 것뿐이지 실제 각 지방의 통치는 여전히 호족들의 손에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호족들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어 언제든지 왕권에 도전하거나 거병할 수 있는 상태였다. 왕건은 그들을 일시에 통솔하려 서둘다가는 오히려 정권의 안정을 깨뜨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들과 일단 군신관계를 맺는 것으로 그치고 토지와 백성에 대해서는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방법이었다.

왕건은 또 고려에 복속해 온 신라 후백제의 귀족과 호족에 대해서도 같은 화합 및 회유정책을 펴 그들에게 상당한 지위와 식읍을 주어 대접하면서 새 왕조의 신하로 삼았고 가능하면 혼인정책으로 인간적인 결연을 맺었다. 그 결과 제각각이던 호족들과 삼국 유민들의 민심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국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송악산의 모습. 고려 수도였던 개성은 북쪽의 송악산(488m)을 중심으로 한다. 서울의 북악산이 342m, 북한산은 836m라고 보면 송악산의 높이가 짐작이 간다. 남쪽에서도 날씨가 좋으면 인왕산 너머로 송악산이 빤히 보일 정도로 가깝다.
고려국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송악산의 모습. 고려 수도였던 개성은 북쪽의 송악산(488m)을 중심으로 한다. 서울의 북악산이 342m, 북한산은 836m라고 보면 송악산의 높이가 짐작이 간다. 남쪽에서도 날씨가 좋으면 인왕산 너머로 송악산이 빤히 보일 정도로 가깝다.
고려 정궁 만월대 남북합동조사단 모습.  만월대는 개성 송악산 아래 50만 평에 달하는 넓은 황성 옛터로 남아 있다. 본래 만월대는 정전인 회경전(1023년 건축)과 그 기단 일대를 가리키므로 이 궁궐의 정확한 명칭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고려 이후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으로 음력 정월대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려 정궁 만월대 남북합동조사단 모습.  만월대는 개성 송악산 아래 50만 평에 달하는 넓은 황성 옛터로 남아 있다. 본래 만월대는 정전인 회경전(1023년 건축)과 그 기단 일대를 가리키므로 이 궁궐의 정확한 명칭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고려 이후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으로 음력 정월대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려의 지방분권제 실시, 서경(평양)을 재개발 수도를 이원화했다

세종시를 만든 것 같은 특별한 지방자치 시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지형 특성상 송악(개성)은 한반도 한복판에 위치한 지역이다.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개성은 중국으로부터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후방에 있고 남쪽의 왜구나 변방의 침입으로부터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평양에 별도의 수도를 세울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왕건 당시의 국경은 평양 위로부터 원산을 잇는 국경이었기에 북방으로부터의 공격이 있을 경우 개성은 곧바로 위기 국면을 맞을 수 있었다. 태조 왕건은 즉위한 다음 해 자신의 고향인 송악으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대도호부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 이로써 양경(兩京, 개경과 서경)체제를 갖추고 평양에는 대대적인 성곽을 보수 증축하도록 했다. 또 태조 13년에는 서경에 학교를 세우고 6부의 생도들을 가르치게 하고 왕건의 가문과 대대로 친해 왔던 지역의 인구들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했다. 태조 왕건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고도 평양이 황폐된 지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터전은 아직 남아 있다. 가시나무만 무성하게 남았는데 변방의 무리들이 사냥을 다니고 있어 변경의 읍들이 위협받을 소지가 있다. 이에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굳게 지켜 백성에게 이익이 되게 하라.”(고려사 권 1 9월)

평양을 굳건히 지키는 것은 변경의 방비에서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남쪽의 혹시 있을지도 모를 반란에도 대비하기 위한 위험 분산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의식도 이 기회를 통해 변화시키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왕건의 위험분산 정책으로 선보인 장기적인 통일부국책의 하나였다. 태조는 이를 통해 북진 정책을 계속하여 압록강 부근의 안주부터 화주(영흥)까지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정하는 영토 확장을 이루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왕건 묘 :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다. 태조와 왕비 신혜왕후 유씨의 능이 함께 위치한다. 태조가 재위 26년인 943년 6월 임신에 세상을 떠난 뒤 송악산 기슭에 조성하였다.
왕건 묘 :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다. 태조와 왕비 신혜왕후 유씨의 능이 함께 위치한다. 태조가 재위 26년인 943년 6월 임신에 세상을 떠난 뒤 송악산 기슭에 조성하였다.

왕건의 리더십을 오늘의 시각으로 본다면? ----  

왕건의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만큼 배울 점이 있다 
그의 혼인정책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국내외 경쟁기업들과의 기술제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기술제휴는 적성국가 아니 경쟁업체와는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제 개방과 글로벌 시대를 맞아 이런 원칙은 하나씩 깨어지고 있다. 일본의 부품업체가 애플과 계약하고 삼성전자가 소니랑 손잡고 같은 제품 어셈블리를 공급하며 국내업체끼리도 삼성과 엘지가 부품을 공유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적과의 동침이 너무도 당연시되고 있는 셈이다.

왕건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에 이를 시도했다. 무려 29개 경쟁호족과의 연합정책이 그것이었다. 여기서 그들 호족이 가장 사랑스러워하는 딸 하나씩을 후비로 얻어 혼인정책을 통해 양측의 실리를 꾀한 것이다. 이는 너무도 실리주의적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리더십에 반발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왕건은 그 반발을 잘 마무리하고 군주 개인의 어쩌면 가장 사적인 결혼을 나라의 안녕과 연결시킨 놀라운 발상으로 미안정의 고려를 극적으로 안정시키는 위업을 이루어냈다. 

지금도 익숙한 관행에 젖어 마음과 울타리를 열기 두려워하는 CEO와 철밥통 관료들에게 왕건이 보여준 리더십은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왕건의 리더십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포용을 기반으로 한 소통이다. 혼인정책이 혈연을 중심으로 한 소통 정책이었다면 적국의 군주를 껴안고 식읍을 주어 지역을 다스리게 하며 그 부하들을 중직에 활용케 하는 담대함은 지금 시점에 봐도 참 멋지고 기가 막힌 묘수다. 그렇게 열린 감각과 지혜를 가진 신생국 고려의 첫 CEO 왕건의 빼어난 리더십이 있었기에 고려왕조가 474년간이나 존속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흔히 장수 그룹의 창업자에게서 창업의 혼을 배워야 한다고 자서전을 만들어 읽게 하고 그들의 삶을 반추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필자는 왕건이야말로 롱런하고 싶은, 가장 오래 살아남고 싶은 기업의 조직원들이 읽고 배워야 하는 역사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고려 태조 왕건은 그런 칭송을 받아 마땅한 걸출한 리더십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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