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열두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동아시아 바다를 호령했던 천년의 세계인 장보고

완도에 가본 적이 있는가? 완도는 볼 거리 먹을 거리가 많은 곳이다. ‘조개의 왕’인 전복을 대량으로 양식하여 대중화에 성공한 것은 완도의 힘이다.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 청산도, 고산 윤선도의 정취가 깃든 보길도, 항일운동 3대 성지인 태극기 마을 소안도 등 멋스런 섬들이 있다. 한편 드라마 《해신》 촬영지와 난대림의 보고인 완도수목원도 놓칠 수 없는 곳이다. 그런가 하면 PGA 8회 우승한 세계적인 골프스타 최경주의 고향이기도 하다. 

▲ (자료출처:완도관광문화 누리집) 청해진 유적지로 추정되는 완도 장도(장군도)

하지만 정작 필자의 주목을 끈 곳은 다른 데 있었다. 한 번은 완도읍 장좌리 장도(장군섬)라는 섬에 갔었다. 장보고 청해진의 유적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특별할 것 없는 그 섬 주위의 갯벌속에 청해진 당시의 목책이 보존되어 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섬 쪽으로 해적의 배가 접근하지 못하게 나무를 깎고 물속에 박아 울타리를 쳤던 것이다. 

그 목책이 1959년 태풍 ‘사라호’의 영향으로 천년의 세월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1991년부터 청해진 유적지 발굴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목책을 볼 수 있을까 해서 바닷가로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위치만 깃발로 표시되어 있을 뿐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이며 천 200년 전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장보고 대사는 무슨 생각으로 신라의 변방이었던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였을까? 그는 여기서 무슨 활동을 어떻게 하였을까?   

장보고 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도 드물다. 보통은 바다에서 활동했던 신라의 장군쯤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보면 그 스케일과 활동상에 놀라게 될 것이다. 당시로 돌아가 바다와 함께 했던 장보고 대사의 장쾌한 삶을 들여다보자.

장보고는 어린 시절 활을 잘 쏜다하여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불리었다. 당나라에는 장보고(張保皐)로, 일본에는 장보고(張寶高)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활동했던 8~9세기는 통일신라 후기로서 정치 사회적 환경이 격변하던 때였다. 동아시아 종주국이었던 당나라는 755년 안녹산의 난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가 약화되고 혼란이 가중되었다. 신라도 822년 김헌창의 난에서 보듯이 중앙 정치세력 간의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전국이 혼란에 빠진 시기였다. 

▲ (자료출처:중국 적산법화원) 장보고와 정년을 그린 역사기록화 ‘무녕군의 두 장군’

장보고가 당나라에 가게 된 것은 신라의 신분제 때문이었다. 신라는 골품제(骨品制)를 엄격히 적용하였는데 신분이 미약했던 장보고는 아무리 무술이 뛰어나도 출세할  길이 없었다. 반면 당나라는 능력만 있다면 외국인에게도 벼슬을 주는 개방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고향에서 무술을 연마한 후 20세 전후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군에 입대하였다. 

당시 당나라는 지방 책임자인 절도사들의 반란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장보고가 소속되었던 무령군은 바로 절도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부대였다. 무예가 뛰어났던 장보고는 산동반도 10개주를 55년간 장악했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며 30세에 무령군 소장에 올랐다. 이정기의 반란이 진압된 후 장보고는 달리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군대를 나왔다. 

그 당시 중국 동해안을 따라 북쪽의 산동반도와 남쪽의 대운하, 회수(淮水) 유역에는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이 모여 살았다. 이들 신라방 사람들은 연해(沿海) 무역에 종사하였을 뿐 아니라 황해권을 중심으로 신라, 일본, 발해, 아랍,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신라인 사회로 들어와 무역에 종사하면서 재물을 모았다. 그리고 국제무역을 주도하는 신망 받는 인물로 자리 잡아 갔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활동하는 동안 신라인이 해적에게 잡혀와 노예로 팔리는 현장을 많이 목격하였다. 마침내 장보고는 828년 신라로 귀국하였다. 이어 흥덕왕을 뵙고 “중국에서 신라 사람을 노비로 삼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해로의 요지에 진영을 설치해 해적들로 하여금 사람을 약탈하여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이에 왕이 1만명에 대한 징발권(徵發權)과 함께 요청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설치된 청해진(淸海鎭)은 기능상 3개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우선 해적을 소탕하고 바다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시급했는데 이 일은 병부(兵府)에서 맡았다. 다음은 해상 질서의 바탕위에서 무역과 선박・선원 관리 등을 하는 것은 민부(民府)에서 맡았다. 그리고 당과 일본에서 무역의 거점역할을 하는 현지 집단거류지인 자치제(自治制)가 있었다. 

▲ (자료출처:중국 적산법화원 장보고 기념관) 신라시대 교관선(일종의 무역선)복원 모형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치안을 안정시킨 장보고는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를, 일본에는 회역사를 파견하였다. 이렇게 청해진이 생기면서 당나라 산동반도-신라 청해진–일본 큐슈를 거점으로 동양 3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해양상업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청해진 사람들이 타고 다닌 무역선을 교관선(交關船)이라 불렀는데, 교관선은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던 신라선 이었다. 9세기 신라선은 당과 일본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속일본후기》에는 840년 쓰시마 섬의 관리가 "공물과 공문서를 실은 배가 자주 바람과 파도에 표류하는데, 신라 배는 능히 파도를 헤치고 갈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838년 일본 사절단이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돌아갈 때 자신들이 타고 간 배를 버리고 우수한 신라선 9척을 고용해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보고가 활약하던 8~9세기 세계의 바다는 두 세력이 활약하고 있었다. 유럽은 바이킹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크나르선을 이용하여 약탈과 교역을 병행하였다. 북유럽 바다와 지중해까지 진출하였고 러시아를 관통해 아랍 상인과도 교역하고 있었다. 한편, 지중해에서 인도양을 거쳐 남중국해에 이르는 항로는 다우(dhow)선을 앞세운 압바스(750년~1258년) 제국의 이슬람 상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 (자료출처:해양교육포탈) 장보고 시대,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아랍까지 연결된 해상실크로드

851년 이슬람 상인이 쓴 《시나 인도 이야기》에 남중국해 무역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중국 동쪽 황해권의 무역은 신라인이 장악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서쪽 유럽에서 동쪽 끝 일본에 이르는 2만 8천km의 항로중에 중국-신라-일본을 잇는 황해권 항로는 장보고 대사의 손에 의해 관리되었다. 미국 하버드대 라이샤워(Reischauer) 교수는 청해진의 역할을 세계 해양사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한편, 장보고를 ‘해상상업제국’의 ‘무역왕(merchant prince)’으로 표현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동아시아 바다를 호령하던 장보고 대사는 841년경(?)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는 문제로 귀족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귀족들은 막강한 재력과 군사력을 가진 장보고가 두려워 엄두를 못내다가 그와 가까운 염장(閻長)을 청해진으로 보냈다. 그날 저녁 장보고와 염장은 단둘이 회한을 풀며 흠뻑 취하였고 염장은 장보고가 잠든 사이 그를 살해하였다. 지금도 ‘염장 지르다(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가만히 있는 속을 들쑤시어 괴롭고 힘들게 하다)’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는데 염장이 장보고를 속여서 살해한 데서 연유한다.            - 다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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