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열세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동아시아 바다를 호령했던 천년의 세계인 장보고

장보고 사후인 851년 청해진은 폐쇄되었고, 그 곳 백성들은 벽골군(지금의 김제)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더구나 청해진에는 이후 500년 동안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다가 1351년 고려 말에 다시 살도록 허가하였다.  

그런데 장보고 청해진의 성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청해진(淸海鎭)은 “널리 바다를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즉, 해적을 깨끗이 소탕하여 무역로를 보호하고 안정된 해상치안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그 의미대로 장보고 대사는 빛나는 성과를 이룩하였고 동아시아 바다 전체의 치안유지와 국제 무역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볼 때 장보고 대사는 현재의 해양경찰이 수행하는 기능과 지극히 유사한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자료출처:완도 장보고 기념관) 장보고 대사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는 한중일 삼국의 역사서(왼쪽부터 삼국사기, 신당서, 속일본후기)

청해진은 비슷한 시기에 설치되었던 진들과 다른 특성이 있었다. 패강진(함경도 평산), 당성진(경기도 화성), 혈구진(경기도 강화) 등은 그 지역의 명칭을 따서 지었고, 변방수비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청해진의 명칭은 지명을 따르지 않았으며, 외적 방어나 군사적 목적이 아니었다. 청해진은 외적을 물리치는 ‘군사적 임무’보다는 해상무역을 방해하고 해상치안을 어지럽히던 해적을 퇴치하는 ‘해상 치안임무’를 수행하였다. 

오늘날 장보고 대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위대한 업적과 성과에 비해 초라한 대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해양인에 대한 기록은 우리보다 일본이나 중국의 사서에 자세하게 되어 있다. 

당나라 두목이 지은 《번천문집》이나 당나라 정사인 《신당서》에는 장보고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의 활약상을 높게 평가하였다. 무령군에서 활약, 청해진의 설치 과정과 해적 소탕, 정치 분쟁 개입, 정년과의 우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장보고를 ‘원한으로서 서로 시기하지 않고 국가의 근심을 먼저 생각한 인물’로 묘사하여 그가 중국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나 정사인 《속일본후기》는 장보고 선단의 대외 교역 활동과 재당 신라인의 생활상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에게 보내는 편지와 청해진 종사자와 직접 접촉한 정황뿐만 아니라, 청해진 폐진 이후의 상황도 그려져 있다.

반면 우리나라 기록인 《삼국사기》는 그에 관하여 《신당서》와 《번천문집》에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 외에 중국 측 사서에 보이지 않는 일부 정치적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도 장보고 이름이 ‘궁파(弓巴)’였다는 것과 염장이 장보고를 암살하는 과정 외에 별다른 내용이 없다.

▲ (자료출처:완도군청)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중국 적산법화원’, ‘일본 적산선원’, ‘완도 장보고 사당’, ‘완도 법화사 절터’

오늘날 장보고 대사를 기리는 노력도 이웃 나라에 비해 소홀한 것이 현실이다. 중국은 당시 장보고가 지은 절인 ‘적산촌 법화원’을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산동성 최대의 관광지로 만들었다. 또한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인 ‘적산선원’에는 장보고를 재물의 신으로 모시며 추앙하고 있다. 이에 반해 장보고의 고향인 완도를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완도 상왕봉에 법화사 절터만 있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조촐한 장보고 사당은 바다가 아닌 산을 향하고 있어 청해정신의 의미를 반감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장보고 대사의 청해 정신(프론티어 정신)은 역사적인 쾌거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먼 바다를 장악했던 사람은 오직 장보고 한 사람이었다. 장보고가 누볐던 바다의 스케일은 당시의 기술진보 단계에서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가 활약했던 9세기는 조선술과 항해기술이 연안에 머무르던 연안항해의 시대였다.  이러한 때 장보고 대사는 신라-당-일본을 잇는 먼 바다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 (자료출처:완도군청) 완도 장보고 기념관에 있는 장보고 동상

이를 현대 선박의 크기와 항해기술을 적용하여 해석한다면 아마도 태평양과 동남아 바다 전체의 제해권을 좌지우지하는 정도일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성웅 이순신 장군도 연안에서 침입하는 왜적을 격퇴한 것이지 능동적으로 먼 바다에 나가 해상권을 장악한 경우는 아니었다.

장보고는 홍해-아랍해-인도양을 거쳐 남중국해로 이어지는 무역항로를 황해에서 이어받아 일본과 연결하였다. 그는 한반도를 벗어나 바다를 호령하며 동아시아 바다를 쥐락펴락했던 세계적인 인물이었다. 한·중·일 3국의 정사에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었고, 우리나라보다 중국과 일본에서 더욱 숭앙받는 인물이다.  

완도대교를 건너 완도읍으로 가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멀리 장보고 대사의 동상이 정면에 나타난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면 장보고 동상은 여타 동상과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동상은 오른손에 작은 칼을, 왼손에 물품도록을 쥐고 남해의 푸른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갑옷을 입고 있으나 투구를 쓰지 않고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다. 장보고 대사의 이런 모습은 전쟁을 하는 장군이 아니라 해적을 물리치고 동시에 해상무역을 전개했던 해상치안의 총수 혹은 무역왕의 이미지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필자는 우리나라 해양사 측면에서 상상을 해보곤 한다. 장보고 대사가 살아남아 30년만 더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했다면 우리나라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쉬움이 크게 남는 대목이다. 장보고 대사는 오늘도 멀리 동아시아 바다를 바라보며 후손들에게 외치고 있다. “널리 바다를 깨끗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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