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스물 여섯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천만 명의 쿤타킨테가 노예선을 탄 까닭은? 

《뿌리》는 1976년 실화를 바탕으로 알렉스 헤일리가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1767년 아프리카에서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혀 미국으로 끌려온 쿤타킨테와 후손들이 겪은 수난과 자유를 찾는 여정을 그렸다. 실제로 알렉스 헤일리는 주인공 쿤타킨테의 외가 쪽 7대손이었다. 

▲ (자료출처:flickr.com) 영화 “뿌리” 포스터

그는 조상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가는 화물선을 탔었다. 그리고 항해하는 동안 쿤타킨테처럼 팬티만 걸친 채 딱딱한 바닥에 거적을 깔고 잠을 잤다고 한다. 

영화로 제작된 《뿌리》의 장면을 보면 누구나 당시 흑인 노예의 비참함과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 천만 명 이상 흑인이 식민지로 끌려갔던 노예무역은 무려 3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누가 이들을 사냥하고 강제로 노예선에 태웠는가? 왜 이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아메리카로 가야만 했는가? 감추고 싶은 인류의 흑 역사, 바다 위의 지옥이었던 노예 수송선의 비밀을 알아보자.     

혀 끝의 달콤한 유혹, 설탕이 가져온 나비효과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는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작은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로 이어진다는 이론을 말한다. 그 예로서 브라질에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혀 끝에 감기는 설탕의 달콤함이 흑인 노예제도를 촉발시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흑인 노예제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추적해보면 이 말에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흑인 노예제도를 단순화시키면 이렇다. 유럽에서 설탕 소비가 증가하였다. 설탕 공급을 위해 식민지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본격화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이 흑인 노예 수입으로 이어졌다. 

순수한 설탕을 자당(蔗糖)이라고 한다. 백설탕은 자당 그 자체인데 자당의 비율이 높을수록 열량도 높다. 자당은 몸에 바로 흡수되어 열량으로 쓰일 수 있는 데다 중독성도 있다. 설탕이 코카인 등의 마약과 비슷한 정도의 만족감을 주며 강한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

사탕수수나 사탕무에서 자당을 결정화하는 기술은 4세기경 인도에서 개발되었다. 유럽에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11세기경 전파되었는데,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곳이 지중해 일부만 가능해서 비싼 작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콜럼버스의 2차 항해 때 식민지 아메리카로 가져가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흑인”

이후 사탕수수는 식민지 플랜테이션에서 대량으로 재배되었다. 설탕은 왕족과 귀족을 중심으로 소비량이 꾸준히 늘어났다. 한동안 설탕은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가 시꺼멓게 썩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동자의 식생활을 상징하는 식품으로 변모하였다. 설탕 가격이 계속 낮아져서 같은 돈으로 채소나 고기를 사는 것보다 설탕이 열량 면에서 훨씬 효율적이었다. 초기에 라면 한 봉지가 일반 가정집의 한 끼 식사보다 비쌌겠지만, 오늘날 가난한 사람이 라면으로 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식민지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이 늘어나면서 노동력 공급 문제에 직면하였다. 플랜테이션 운영은 지극히 노동집약적 형태였다. 먼저 넓은 밭에서 키 크게 자란 사탕수수를 베어서 압착기로 즙을 짜냈다. 이것을 큰 솥에서 몇 단계에 걸쳐 끓이고 정제하여 결정 덩어리를 얻었다. 이 과정은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 했으므로 노동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연료로 쓰일 많은 땔감을 구하는 인력도 필요했다. 

그런데 하필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흑인이 지목되어 끌려 왔는가? 초기부터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들여온 것은 아니었다. 최초에는 유럽에서 데려온 하층민 계약 노동자들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적은 임금을 받고 뜨거운 열대에서 중노동을 감당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체력이 약한 데다 유럽인이 들여온 전염병으로 인구 대부분이 절멸한 상태였다. 

▲ (자료출처:flickr.com) “바야돌리드 논쟁”

이런 상황에서 1550년 유명한 바야돌리드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인권에 관한 토론이었다. 여기서 철학자 세풀베다는‘인디오는 노예일 뿐이고 유럽인과 동등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쳤다. 선교사 라스카사스는 반대 입장이었다.‘인디오도 유럽인과 같은 인간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회의 결과는 이후 엉뚱하고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교황의 명을 받고 회의를 주재한 살바토레 론체리 추기경은 인디오 논쟁을 라스카사스 주장대로 결정했다. 하지만 식민지의 인력 문제가 시급하므로 인격체로 볼 수 없는 아프리카 흑인을 데려오자고 결론지었다. 결국 설탕에 매료된 유럽인의 입맛이 흑인 노예제도를 탄생시켰다. 17세기가 되자 아프리카는 유럽인의 노예 사냥터로 변했다. 

흑역사를 가진 신사의 나라 

흔히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한다. 하지만 영국이 독점했던 흑인 노예제도에 대한 진실을 알고서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미지수다. 

영국에서 노예무역 시초는 1562년 호킨스였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를 운송하는 밀무역으로 돈을 벌었다. 호킨스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1672년 이후 영국은 ‘왕립 아프리카 회사’를 만들어 노예무역을 국가가 독점하였다. 명칭에서 보듯이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국왕의 후원을 받는 국영회사였다. 그러다가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개인의 자유무역 원칙이 정립되었고, 17세기 말 국가는 독점권을 상실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국은 1783년까지 시종일관 노예무역을 국가정책으로 장려하였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호킨스 초상화”

당시는 식민지 무역을 두고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때였다. 영국은 국가의 흥망성쇠가 걸린 노예무역에 사활을 걸었다. 영국 입장에서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삼각 무역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노예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면 커다란 경제적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삼각 무역의 순환 과정은 이렇다. 영국에서 생산된 상품을 싣고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상품을 팔고 노예를 산다. 노예를 아메리카에 팔고 현지의 사탕수수, 목화, 당밀과 같은 천연자원을 매입한다. 다시 이것을 싣고 영국으로 돌아가 천연자원을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3중의 이익을 남길 뿐 아니라 수입된 자원을 이용한 새로운 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18세기에 발달했던 영국의 도시들은 어떤 식으로든 삼각 무역에 관련이 있었고, 대중에게도 이익이 돌아가는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다. 실제로 1783년 이전까지 왕실, 정부, 교회, 일반 여론에 이르기까지 노예무역을 적극 지지하였다. 

▲ (자료출처:google) “흑인 노예무역”

그런데 영국은 어떻게 경쟁국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물리치고 노예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을까? 초기 아메리카로 공급되던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서안에 노예 집적지를 확보하였던 포르투갈이 거의 전담하였다. 노예공급 거점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스페인은 16세기 아시엔토 (asiento)라는 것을 만들었다. 

아시엔토란 국가나 개인이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통해 연간 일정 수의 노예를 아메리카 항구로 공급할 수 있는 독점권을 말한다. 이에 따라 18세기까지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뿐만 아니라 개인 자격의 스페인 사람들도 이러한 계약에 참여하였다. 

그런 와중에 1701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하였다. 여기서 영국 등이 승리하면서 스페인으로부터 아시엔토 대부분을 얻어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경쟁국인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밀어내고 노예무역의 최강자로 우뚝 섰다. 

명실상부한 노예무역의 본거지였던 리버풀항은 노예 수송선이 쉼없이 오갔다. 이곳에서 노예의 가격이 결정되고 노예 사냥의 노하우가 전수되었다. 이곳은 노예의 집산지였으며 노예 거래가 이루어지는 최대 시장이었다. 1680년~1786년 사이에만 영국이 실어나른 흑인 노예는 2백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노예 수송선”

바다 위의 떠다니는 지옥 노예 수송선 

아프리카에서 초기 노예사냥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내부에 자생하던 노예상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하여 이루어졌다.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을 잡아 목과 발에 체인을 채우고 해안으로 끌고 갔다. 해안까지 하루에 수 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걷는 과정에서 매질, 영양실조, 질병에 시달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40%가 사망했다고 한다.

해안가에 도착해서는 배를 타기 전까지 감금되는 수용소에서 대기했다. 이곳에서는 수 백명이 좁은 공간에서 먹고 잠자고 배설을 해야했다. 여기서 며칠 내지 몇 주를 기다려야 노예 수송선을 탈 수 있었다. 

노예 수송을 위한 전용 선박은 주로 리버풀에서 건조되었다. 이 선박은 노예를 최대한 많이 실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질식을 막기 위한 통풍구가 필수였다. 또 수갑, 쇠사슬, 채찍, 손가락 고문 도구 등도 비치했다. 심지어 음식을 거부하는 노예에게 목구멍을 억지로 열어 강제 급식을 하는 도구까지 있었다. 

노예 수송선 규모는 100톤 ~ 300톤의 소형이었다. 이 배에 노예 300명 ~ 500명 정도를 태웠다. 발을 옆사람 머리쪽으로 차례로 포개어 화물 쌓듯이 선적했다. 한사람에 배당되는 공간은 세로 168cm, 가로 40cm 정도로 관보다 적었다. 사람을 태웠다기 보다는 빼곡이 채워서 실었다. 

항해하는 동안 체인이 채워진 채 일어서지도 못하며 그 자리서 음식을 먹고 잠을 잤다. 이런 상태로 대서양을 건너는 데는 50일~80일이 걸렸고 심지어 몇 달이 걸렸다. 빽빽한 밀도, 나쁜 위생 상태, 음식과 물 부족으로 항해 중 많은 노예가 목숨을 잃었다. 마커스 레디커의 ≪노예선≫에 따르면 대략 1500년부터 1870년 기간 동안 1천 240만 명이 노예선을 탔다고 한다. 그리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18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노예 수송선의 극단적 사례는 종(Zong)호 사건에서 볼 수 있었다. 100톤이 조금 넘는 종호는 1781년 9월 400명이 넘는 노예를 싣고 아메리카로 향하였다. 두 달 후 보급 부족으로 60명 이상의 노예와 선원이 죽자 선장은 극단적인 명령을 내렸다. 노예 133명을 바다에 던진 것이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종(zong)호 사건”

종호가 리버풀항으로 귀항하자 선주는 보험금을 청구했다. 선주의 주장은  배를 구하기 위해 화물을 바다에 던졌으므로 보험금을 지불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선주는 패소하여 보험금은 지급되지 않았지만 노예를 던진 행위에 대해 종호의 선원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노예를 던진 것은 말을 던진 것과 마찬가지’라는 법원의 판결이었다. 오늘날 시점에서 보면 극히 극악무도한 사건이었지만 당시는 노예를 바다에 던진 것이 반인권적인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존 뉴턴(John Newton)은 18세기 노예선 선장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후 목사가 된 그는 노예선 경험을 참회하며,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만들었고 노예무역 폐지에도 앞장섰다. 

오늘날 우리는 아직도 노예제도를 접하며 살고 있다. 미국과 중남미에 살고있는 많은 쿤타킨테의 후손들이 노예제도이다. 그들이 날마다 접하는 가난과 인종차별, 그리고 절망은 대서양을 건너던 노예선의 기적 소리에 맞닿아 있다. 존 뉴턴은 전향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았겠지만, 그가 운송했던‘검은 상품들’은 오늘날까지 놀라운 축복(Amazing Grace)을 경험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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