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 스물 여덟 번째 -

바다는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했던 근원이며, 생명체에 필수적인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날씨를 조절하며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70.8%를 차지하는데, 이는 육지 면적의 2.43배이며 부피는 13억 7천만 km3에 이른다. 그리고, 바다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미개척지로 인류가 탐사한 심해는 2% 정도에 불과하다. 탐사하지 못한 나머지 심해에는 어떤 생물이 살지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험하니까 물가에 가지 말라든가 배를 타는 것 자체를 위험시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슬기와 지혜를 모아 해양개발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다. 세계는 해양을 미래자원의 보고(寶庫)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해양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법칙이 오늘날에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웃도어 정보신문 ‘바끄로’는 우리가 꼭 개척해야 할 바다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바다 전문가의 재미있는 바다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 바다를 지키며 우리 바다의 치안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해양경찰교육원의 고명석 원장이 들려주는 미래자원의 보고(寶庫) 바다와 얽힌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통해 바다와 좀더 친숙해 보자.  -편집자 주-

▲ ▲ 해양경찰교육원 고명석 원장

 

갈린 운명의 두 표류자, 조선과 일본에 표착하다

지구의 동쪽 끝에 표류했던 파란 눈의 이방인들

전남 강진군 병영면에 가면 전라 병영성이 있다.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 육군을 총괄 지휘했던 본부가 있던 장소다. 그런데 산골인 이곳을 둘러보던 사람들은 의외의 풍경에 놀라게 된다. 네덜란드 상징인 풍차가 성벽 옆에 우뚝 서 있고 그 뒤로 이국풍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파란 눈의 표류자 하멜(Hamel)이 7년간 유배를 살았던 마을이다. 이 하멜기념관에는 실물 크기 하멜 동상이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의 손가락과 눈동자는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을 향하고 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위) 전라병영성 (아래) 하멜기념관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 《여수 밤바다》로 유명해진 여수시 하멜로에도 하멜 유적지가 있다. 여기도 풍차가 있고, 전라병영성의 것과 동일한 하멜 동상이 서 있다. 네덜란드 호르큼시에서 제작하여 두 곳에 기증한 것이다. ‘하멜 등대’로 불리는 이곳이 그가 조선에서 마지막 3년을 머물다 일본으로 탈출했던 장소이다.

16세기 동아시아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492년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해 신대륙을 발견했다. 아프리카를 돌아 동쪽으로 향하던 포르투갈은 바스코 다 가마를 앞세워 1498년 인도에 도착했다. 조용했던 동아시아 바다가 들끓기 시작했다.

16세기 초 동남아에 먼저 진출한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1511년 포루투갈은 동남아 집산항이던 말라카를 함락시켰다. 이후 1513년 말루쿠 제도에 상관을 설치하였고, 1515년에는 페르시아만 호르무즈를 제압했다. 중국과 동남아 간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은 1557년 마카오에 무역중심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1571년부터는 포르투갈 배가 나가사키에 내항했다.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에 주력하던 스페인도 1571년 마닐라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스페인 왕 필리페 2세 이름을 따라 그 땅을 ‘필리핀’이라 불렀다. 이후 멕시코와 마닐라를 잇는 태평양 항로가 열렸다.

1704년경 제주도 목사를 지낸 송정규가 지은 ≪해외문견록≫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제주도에 발생했던 표류 사건을 정리한 책이다. 여기에는 중국, 일본, 유구(오키나와), 안남(베트남) 등으로 표류해 갔거나 제주로 표류해왔던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하멜과 최부의 표류 이야기도 나온다.

이처럼 16세기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는 이미 해양을 통해 빈번히 교류하고 있었다. 하멜이 제주에 상륙한 해가 1653년이니 아시아 바다가 열린 지 100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다. 표류인 많아지고 이양선 출현이 잦아졌지만 조선 지배자들은 바깥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멜, 낯선 땅 조선에 표착하다

하멜은 1653년 8월 제주도 표착했다가, 1666년 9월 탈출할 때까지 13년 28일을 조선에 머물렀다. 그는 스물네 살에 표류한 후 서른아홉 살이 되어서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가 조선에서 1년 이상 살았던 곳만 해도 제주, 한양, 강진, 여수 등 네 군데나 되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하멜 표류기

1668년 네덜란드에 돌아간 하멜 일행이 조선에 머물렀던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려 동인도회사에 일지를 제출했다. 그 일지가 우리가 아는 하멜표류기이다. 표류기는 당시 겪었던 사건을 일자별로 기록한 《하멜 일지》와 조선의 관습과 생활상을 기록한《조선국에 관한 기술》두 책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멜의 사연은 이렇다. 그는 1630년 네덜란드 호르쿰의 자산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에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바타비아(자카르타)에 파견되었다. 거기서 1653년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좌초되었다.

살아남은 일행 36명이 제주 목사 앞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으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난 즈음 붉은 수염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25년 전 조선에 표류했다 귀화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Weltevree)였다. 그는‘박연’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바꾸고 훈련도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사정을 알아보려 왕이 보낸 거였다. 그는 모국어를 거의 잊고 있었다.

▲ (자료출처:Google) 박연(벨테브레) 동상

겨우 박연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길 청하였으나, 조선은 외국인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며 여기서 여생을 마쳐야 하는 게 이 나라 법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일행은 병졸들 감시하에 왕의 교시를 기다렸다.

1654년 5월 왕으로부터 서울로 압송하라는 답신이 왔다. 해남-나주-정읍-전주-공주를 거쳐 한양에 올라간 일행은 왕(효종)을 만났다. 일행은 자기들을 일본으로 보내 고국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벨테브레 말처럼 왕은 “외국인을 보내는 것은 이 나라 관습이 아니며, 부양을 해 줄테니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아라!”고 대답했다. 일행은 왕의 친위대에 소속되었으며 호패도 교부받았다.

일행은 한양에 있을 동안 고관들 집에 불려 다녔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구경거리였다. 또 사람들 관심 때문에 거리를 지나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한양에서 2년을 보낸 일행은 1656년 3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을 떠났다. 일행 중 두 명이 탈출을 목적으로 몰래 청나라 사신을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라도 강진군 병영면에는 전라도와 제주도 육군 총지휘부인 전라병영성이 있었다. 여기서 일행은 병영지기 생활을 하며 지냈다.

유배 생활은 비참할 정도였다. 동네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견뎌야 했다.땔감을 구하러 산속을 헤매거나 구걸을 해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유배 7년 동안 일행 11명이 죽었으며, 22명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기근이 닥쳤다. 지방관은 왕에게 이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다고 요청했다. 이로 인해 1663년 2월 하멜 등 12명은 여수로, 나머지는 순천과 남원으로 이송되었다.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던 여수에서 하멜은 좌수영 문지기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멜과 일행 7명은 어부를 설득하여 배를 사들였고 1666년 9월 4일 배를 띠워 여수를 탈출하였다. 결국 일행은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실로 고향을 떠난 지 20년 가까이 흐른 뒤였다.

조총(댓뽀)를 가지고 온 이방인들

한편 하멜이 표류하기 110년 전인 1543년 같은 달. 일본 큐슈의 남단 동남쪽의 섬인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정체불명의 선박이 표착했다. 이때는 일본이 서양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좌초된 배는 중국 광동에서 출항한 남만선이었는데, 108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포르투갈인도 세 명이 있었다. 배는 심하게 파손되어 수리하자면 여러 날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들은 출항할 때까지 인근 절에 묵게 되었다.

▲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조총을 받아들인 도키타가 동상

그들이 묵고 있는 절에 준수한 외모의 소년이 나타났다. 그는 그 섬의 도주(島主)인 도키타카였다. 젊은 도주는 매일 포르투갈인을 찾아왔다. 그러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멍 뚫린 쇠막대에 호기심을 보였다.

이에 그들은 언덕에 올라가 사격 시범을 보였다. 50보 거리에 말뚝을 세우고 그 위에 큼직한 조개껍데기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쇠막대에 검은 가루와 구슬을 넣고 불붙인 끈을 끼웠다. 이어 뺨을 대고 겨누었다. 순간 쇠막대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며 천둥소리가 났다. 조개껍데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토키타가의 눈빛이 경이로움으로 빛났다.

이 쇠막대가 이후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임진왜란에 사용되었던 조총(鐵砲)이었다. 토키타카는 잠시도 이 물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결국 거금을 주고 2자루를 샀다. 당시 지불했던 돈을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원 정도였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곧바로 칼 명인 야이타 킨베를 시켜 총을 분해하여 국산 제작에 돌입했다. 문제는 화약 폭발력에 총알이 나가도록 뒤쪽을 막는 기술을 체득할 수가 없었다. 이에 사용되는 나사를 깎는 기술이 중요했는데 아무리 궁리해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야이타는 포르투갈인 제이모토에게 외동딸을 주고 나서야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졌던 조총은 전쟁터였던 전국시대 혼란을 마감시켰다.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전술적으로 채택되었고,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는데 일익이 되었다. 그리고 후에 조선 침략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 (자료출처:flickr.com) 조총 각 부 명칭

사실 조선에도 일찍이 조총이 소개되었었다. 일본에 조총이 전래된 11년 후인 1554년에 명종에게 직접 보고되었던 적이 있었다. 또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 대마 도주 요시토시가 선조에게 직접 조총을 진상했다. 하지만 곧바로 창고에 처박혔다. 그리하여 2년 후 조선 땅은 그 조총에 짓밟히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무뎃뽀’라는 말이 있다. 앞뒤 생각 없이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속된 표현이다. 여기서 조총의 일본어 표현, 즉 철포(鐵砲)의 발음이 뎃뽀(てっぽう)다. 그러니 '무뎃뽀(無鐵砲)' 란 전쟁터에 나가면서 조총도 없이 무턱대고 뛰어나가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다. 대마 도주가 일부러 진상한 조총의 효용을 무시하고, 그 총에 강산을 유린당했던 선조야말로 무뎃뽀의 표상이 아닐까?

보았듯이 1543년 일본에 표류했던 제이모토 일행은 호기심 어린 태도에 조총의 비밀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젊은 도주는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탐구하여 시대를 바꿀 물건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110년 후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 일행은 어떠했는가? 우물 안 것만을 고집하는 거부 속에 갖은 고초와 시련을 겪은 후 조선을 탈출했다.

이렇듯 낯섬을 대하는 조선과 일본의 태도는 표류했던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그 태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결국 두 나라의 운명까지 결정했다. 낯섬에 ‘호기심’‘연구’로 다가간 일본은 그 낯섬에서 배우고 나라를 부강시켰다. 반면, 낯섬에 접하여 시종일관‘배척’‘거부’의 태도를 취했던 조선은 나라를 전장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나라 밖 세상이 다 변했는데도 변화와 혁신에 둔감했던 조선. 나라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낯섬을 거부하고 밀어냈던 유교 국가 조선. 하멜이 네덜란드에 돌아간 지 200년이 지난 시점에 조선을 둘러본 외국인이 적은 글을 소개한다. 이 글을 보면 조선에 닥쳐올 일제 식민지 통치를 예견하는 듯하여 입맛이 씁쓸하다.

“네덜란드 배 화물 감독인 하멜은 조선의 예절과 풍습에 대해 나라와 백성에 대해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중략… 언어와 풍속, 양면에 있어서 토착적인 보수주의가 너무 강해서 200년 전 하멜의 표현은 오늘날 조선인의 모든 생활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 제이 코스트의 《조선 역사에 고요히 흩어져 있는 기록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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